촛대는 무엇입니까?

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2월 28일 | 0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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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위와 아래의 선을 "그림자" 라고합니다.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 (계 1:12:-20)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승리하는 신앙’의 저자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는 ‘무신론자였던 내가 목사가 되다니’라는 간증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생후 1년이 되기 전에 고아가 되어 어린 시절부터 기쁨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는 여느 공산주의자처럼 확고한 무신론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에게 해롭다고 생각하고 종교에 대해 증오를 가졌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설교가 마음에 와 닫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신론이 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견디다 못해 가톨릭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무릎을 끊고 그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기도를 했지만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것은 나를 무척 슬프게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계신다면 당신을 믿는 것은 내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당돌했던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루마니아에 있는 어느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 마을의 어떤 목수가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열정적으로 환대하며 성경책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에게 성경을 준 목수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죽기 전에 유대인 한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늙고 병들어 유대인을 찾아 떠나갈 수 없으니 유대인 한 사람을 우리 마을로 보내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목수의 기도와 리차드 범브란트의 기도를 동시에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1948년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4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게 됩니다.

그는 사상범이라 거의 독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3년 동안은 빛도 거의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후에 그가 기적적으로 석방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고독하고 가혹했던 감옥생활 중에서도 어떻게 소망을 잃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감옥에서 성경을 수백 번 읽으면서 체크해 보았더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나와 있더군요. 저는 위협과 두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 기쁨과 감사를 놓치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만큼, 나는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큼 큰 불안은 없는 것입니다.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가 빛도 없는 감옥 속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요한도 늙은 몸으로 죄인과 같이 유배되어 그 형편과 처지는 너무나도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알고 분명하게 있었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크신 역사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오늘 본문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절의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이 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로마황제 도미티안의 박해로 밧모섬에 유배당했습니다.
그는 90이 가까운 노환의 몸이었지만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중노동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당시 그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외로이 예배드리는 요한 앞에 주님은 일곱 금 촛대사이에서 일곱별을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에서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이고, 일곱별은 무엇입니까?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는 누가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누가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만 교회의 운명은 지도자에게만 맡겨진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누가 붙들고 촛대는 무엇입니까? 계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누가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이십니다.
바로 그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떤 때에 교회는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교인들이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곧 무너질 것 같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 같았지만, 사도요한까지도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주님께서는 일곱 금 촛대, 곧 교회를 보호하고 계셨고, 주의 사도들이 다 순교하여 모든 것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끝나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주의 종들을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처음 초대교회 때부터 세상의 권력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세계 속에서 더욱 성장하였고,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갖은 수를 다 쓰지만, 교회는 여전히 주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고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운명은 세상 권력자들과 돈 많은 부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또 교회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교회를 붙드시고 일으키실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 속에 교회지도자들이 함몰되고,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 빠져 흩어지게 될 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욕하고 멸시할지라도, 주께서 의로운 오른손으로 교회와 지도자를 붙들고 계시기에 그루터기의 신앙으로라도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다면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드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교회는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교회의 주인이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13~16절까지의 말씀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상징들이 너무 많아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이 일곱 금 촛대가 교회를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이 구절들은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금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러하신 성품으로 교회에 임재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절들에서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뜻 7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3절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말씀하는데 이 비유는 교회의 거룩함과 영광을 뜻합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하나님의 거룩한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고, 금띠는 그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거룩함을 잃어버릴 때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존경하지 않게 되므로, 교회는 반드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14절의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순결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이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선포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순결하지 못하면,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땅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도 흰 양털같이, 눈같이 ‘순결’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어지는 “그의 눈은 불꽃같고” 라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분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선과 악을 불꽃같이 분별하는 분별력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진리와 불법을 불꽃같이 구별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물론이고 그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간의 분별력’은 교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진단하는 척도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15절의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풀무불에 단련되었다는 말은 많은 고난 속에서 연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순교의 정신이 필요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촛대는 무엇입니까?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그리고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단련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라는 표현은 생명의 풍성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같은 성령님의 생명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소망과 기쁨과 위로의 주의 말씀을 끊이지 않는 생명의 생수처럼 이 땅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16절에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다”는 표현은 20절에 나타난 것처럼 교회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교회지도자들이 거룩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도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특히 오른손이라는 표현에는 특별한 의미와 상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축복이 전달되는 매체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에 대한 비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오른손으로 교회지도자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게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권능’은 성도들이 악한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거룩과 순결, 선악간의 분별력의 기초위에 성령충만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감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이 7가지의 교회를 향한 예수님 뜻을 기억하고 행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날마다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시기 원하시는가?"
"우리교회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결정의 답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 삶의 중심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주의 사자들을 통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촛대는 무엇입니까? 아멘으로 순종할 때, 우리들의 얼굴에는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광채가 날 것입니다.

3. 여러분, 요한계시록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세 가지 계시적 단계가 나타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이러한 상상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상징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악한 세상, 그러나 그 한 가운데 교회를 두시고, 교회를 통해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주님, 그리고 역사는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고 선포하시는 바로 그분.

교회는 때로는 더렵혀집니다.
성도들도 더렵혀집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여전히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을 뽑으셔서 주의 교회를 통해 역사를 이루시려는 주님의 의지를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15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결국 이 말씀은 교회가 넉넉히 이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사도요한은 절망의 때를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그치지 않고, 기도를 그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봄으로 결국, 주의 계시를 받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그 중요성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배를 통해 더 큰 사명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더 큰 사명 곧,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풀어서 해석해 주어야 할 사명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멸시하고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삶들을 조명해 주고, 그늘진 세상에 등불을 비춰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로서, 건강한 교인으로서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기로 결단할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든든히 서 가는 세상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곱 금 촛대와 일곱별의 비밀을 저희에게 계시해 주셔서 감사하옵나이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이 일곱 금 촛대와 같은 우리 교회가 주의 거룩하심과 순결하심과 불꽃같은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언제나 생명수 샘솟는 샘터와 같은 교회, 주의 말씀이 권능으로 선포되어지는 교회, 성령의 역사하심이 좌우에 날선 검 같은 교회, 온성도의 얼굴이 은혜로 해같이 빛나는 교회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모든 축복의 통로는 예배인줄 믿사오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더 큰 소망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촛대는 무엇입니까?

세상 속에서 교회란 어떤 역할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속에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까지 부름 받지 않은 백성을 찾기 위해서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참된 교회의 역할이 아닙니다.

제가 세상 속에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이유는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드러낼 수 있는 구별의 모습이 이스라엘에게 없을 때 이스라엘은 자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옛날 불교처럼 속세와 담을 쌓아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살아가는 정신과 구별되게 사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즉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잃어버릴 때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모습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재정의 많은 부분들을 이웃을 돕는 구제에 쓰고, 선교를 하고,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촛대는 무엇입니까? 도움을 주는 교회일 때 그것이 교회다운 교회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뭔가 생각이 있고 뜻이 있다고 자처하는 목사들이 외치는 교회 갱신, 교회 개혁이라는 것도 교회가 사회에 눈을 돌리자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대형화가 되어간다느니, 너무 비대해져 간다느니, 자기 살찌우기에 바쁘다느니,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이제는 교회도 눈을 자기에게만 두지 말고 사회에 돌려야 할 때다'고 외칩니다. 즉 이제는 교회가 예배당 짓고 교육관 짓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돈을 소비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정성으로 들어온 헌금을 좀 더 뜻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평소 교회가 '돈돈'하는 것에 식상해 있던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다듬어 지고 고쳐지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예수님이 교회를 고치고 다듬고 변화시킨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교회를 다듬고 고치시는 것이 아니다는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란 주님의 몸을 말합니다.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칼빈의 교회관, 즉 교회를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와 보이는 유형교회로 구분을 하고 무형교회는 죽은 자들이 하늘에서 이루고 있는 완전한 교회이고 유형교회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들이 모이는 완전치 못한 교회라는 것은 성경을 비추어 볼 때 잘못된 말입니다. 교회에 대한 칼빈의 의견은 세상에 세워진 교회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지상에 세워진 교회도 교회로 인정을 해야 하는데, 그 속을 보면 죄는 여전하고 교회라고 해서 추악하고 더러운 면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형교회 유형교회로 구분을 해서 유형교회는 얼마든지 개혁하고 고쳐갈 수 있는 것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했을 때, 무형교회가 주님의 몸인지 유형교회가 주님의 몸인지, 어느 것을 주님의 몸이라고 해야 할 지에 대한 곤란함이 발생합니다. 결국 교회를 둘로 구분을 해버리면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를 둘로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고쳐야 하고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는 미완성된 교회가 아닙니다. 완전한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고치거나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고 고치신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몸된 교회를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지체인 그 백성들을 주님의 교회에 맞게 고쳐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개혁과 갱신이라면 맞습니다. 즉 교회가 고쳐지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 의해서 고쳐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의해서 고쳐진 자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많은 분들이 교회를 인간이 고치고 만들어 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인간의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보완되고 고쳐져야 할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를 갱신하자느니 개혁하자느니라고 하면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의 모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교회'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건물이 마련되어 있고, 강대상이 있고, 긴 의자가 놓여 있고, 은석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목사가 있고, 장로님이 있고, 주일이 되면 예배드리고, 헌금을 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그런 것을 교회라고 연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갱신'이라고 하면 현재의 모습에서 좀 더 나아진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즉 지금도 교회이지만, 좀 더 나은 교회가 되는 것이 곧 개혁이고 갱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면 너희는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번 교회가 영원히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석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생각해 버리면 은석교회에 다니는 나는 참된 교인이 되버립니다. 참된 백성이 모인 것이 참된 교회이지 참되 교회에 들어감으로서 참된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님을 머릿돌로 하고 사도들을 기둥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사도들은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핍박을 받았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머리로 한 참된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의 모습에 들어맞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앞에서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자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개혁해야 할 것은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의 모습에서 너무나 멀어져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교회로 모이는 우리들이 과연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에 들어맞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 교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항상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 교회는 진짜 교회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버리고 오직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의 입장과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교회 안에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은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고, 교회가 서로 모여서 원만한 친목단체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교회 되었다는 만족감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까? 13절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말씀합니다. 촛대가 무엇입니까? 이 촛대는 구약에서 성전 안에 위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20절에 보면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말씀함으로서 분명히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촛대는 성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촛대가 촛대 될 수 있는 것은 성전 안에 위치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뭐가 성전이냐는 것입니다. 엉뚱한 성전 촛대는 무엇입니까? 안에서 '내가 촛대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전이 성전 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언약궤입니다. 구약에서 촛대가 놓여 있는 배후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의 중심도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즉 성전 되는 조건은 인간의 손으로 웅장한 건물을 지어 바치고 온갖 경건미를 다 만들어 내도 단 하나 언약궤가 없으면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안되는 이유가, 계시록의 중심은 언약궤에 있기 때문입니다. 11: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는 말씀을 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핵심이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다른 말로 하면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어긋난 것은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조직체의 교회로 상상하면 안됩니다. 교회를 조직체의 교회로 상상하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서 본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느니 제도를 개혁하고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느니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직을 구축하고 그 조직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조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축해야 교회가 발전하고 교회가 튼튼해지고 유지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인간의 힘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13절에 보면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가랴 4:2-3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이 말씀에 보면 등대가 있고 그 좌우 곁에 감람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성전은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어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은 반드시 인간이 세운 성전을 공격하고 심판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슥 4:6절에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에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따라서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모두가 다 가짜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결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신다는 말씀을 스가랴서를 배경으로 해서 해석할 때, '교회는 주님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세우신 교회와 인간이 세운 교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인자 같은 이'라는 말씀에 알 수 있습니다. 인자 같은 이는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인자가 곧 고난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을 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다니엘이 고난받은 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니엘과 함께 하고 있는 다른 한분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른 한분이 드러난 것이 풀무불 속에서였지 않습니까? 결국 다니엘은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도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다른 한분을 바라보고 살아갔었고 그 한분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풀무불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함께 하는 다른 한분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한분 때문에 고난도 핍박도 마다하지 않는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말씀드린 것 같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의미하는 것이 일곱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라는 것은 촛대가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닙니다. 촛대에 보면 가지가 일곱이 있습니다. 촛대 자체는 하나이지만 가지가 일곱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일곱이지만 하나라는 것이 촛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일곱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곱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의미의 숫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를 교회가 일곱이라는 숫자적 의미로 연상하지 마시고, 참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11절에 보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셔서 책망을 하시기도 하시고 칭찬을 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많은 목사들이 설교하기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책망하신 이러한 모습을 버리고 칭찬 받은 모습을 가짐으로서 참된 교회가 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전혀 알지 못한 말입니다.

일곱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책망과 칭찬은, 책망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고발함으로서 하나님께 칭찬 듣는 그 모습이 바로 참된 교회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보고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러한 교회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인간의 힘과 수단과 노력과 도덕과 윤리를 동원해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고 할 때 백이면 백이 어떤 모습의 교회를 상상합니까? 사랑이 넘치고,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빙자해서 인간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구제나 환경운동 같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고 본이 되는 이런 것들을 참된 교회의 기준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심으로써 인간이 세운 교회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약속을 품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이 관심일 뿐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교회이고 말씀에서 어긋나면 교회가 아닙니다.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은석교회는 교회다'는 생각은 버리고 '은석교회가 말씀을 따라가는 자로 모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인간이 교회를 만들겠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교회 바른 교회 이상적인 교회,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경건한 교회 바른 교회 이상적인 교회는 그저 말씀을 따라가는 교회입니다. 말씀에만 관심 두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 교회가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1:18절에 보면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왜 살아나셨습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아닌 것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촛대 사이를 다니면서 교회 아닌 것은 다 잘라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태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에 관심이 없는 교회들은 소위 좋은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항상 고민들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뭘 해볼까?' 고민들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을 흉내내고 도입하고 가르친다고 해도 인간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우린 단지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그분께서 모든 일을 다 하고 계신다는 것만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은 것은 우리도 용납하지 않고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을 우리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싫어한 것을 너도 싫어했으니까 잘했다'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 때문에 지옥가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들 스스로 의로운 일을 열심히 해서 교회답게 되보려고 하고 의를 쌓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 스스로 쌓으려는 의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시간 나의 의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신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개혁입니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승인 2013-09-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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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계시록 1장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주된 내용은 요한의 때로부터 주님께서 재림 때까지 이방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처하게 될 운명과 주님의 재림으로 인한 현 우주와 역사의 대종말, 백보좌 심판, 그리고 구속사의 궁극인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교훈을 묵시 문학이라는 신비하고도 심오한 양식으로 기록해주고 있는 책이다. 그 가운데 1장은 서론격으로서 주님의 묵시적 현현을 기록함으로써 본서에 기록된 메시지가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갖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는 부분이다.

그중 일곱 금 촛대는 요한이 본 환상으로 1:12에서 그 일곱 금 촛대 사이를 주님께서 거닐고 계신 것으로 기록해주고 있다. 아울러 일곱 별은 주님의 오른 손에 들려져 있었다고 1:16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1:20에서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아시아 일곱 교회와 그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앞인 1:11에서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언제나 완전이나 충만을 뜻하는 상징수로 쓰여졌다. 따라서 이는 오고 오는 시대에 이방에 세워져갈 모든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 묵시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뒤에 이어지는 보도에서 별이 어두워지고 땅에 떨어지는 현상들은 모두 교회의 세속이나 타락과 관련한 것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니골라당은 에베소교회와 버가모교회에 주어진 메시지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니골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혹자는 헬라어 ‘니골라이데스’(Nικολαίτης)가 ‘정복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2:14에 ‘발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빌암’(בלעם) 역시 ‘백성을 삼킴’이란 뜻으로 양자가 동의어란 사실에 착안하여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발람의 가르침과 유사하므로(2:14, 15) 그 당파에 발람에 해당하는 헬라식 이름인 니골라가 붙여졌다고 이해한다.

발람은 미디안의 여인들을 통하여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케 했던 이방의 술사였다. 그런데 2:14에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을 지적하며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는 2:15에서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니골라당이 발람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초대교회 당시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무엇인가를 목적하게 하는 것은 곧 발람의 교훈을 좇는 니골라당이라 할 수 있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시간을 표현하는데 있어 세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고 해서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듯,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식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 안에 ‘시간 의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깥 변화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시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아이온’적인 시간이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세대’라는 번역되는 것인데 인간들이 시간을 느끼도록 (변화가 없는 곳에 인간을 시간감각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사건들을 유발시키기 위한 창고나 집합소 같은 시간개념이다. 그래서 이미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일어날 사건 같은 것이 그 시간의 창고 같은 세대 안에서 시간적 요소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기’, 혹은 ‘〜되기’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산보하기, 사랑하기, 인간되기, 출생하기, 죽기, 미워하기, 걷기 같이 (영어로 표현하면 to 부정법) 반복하고 늘 반복을 자행하는 그 원형이 모여 있는 사건 자체로서의 시간 환경이 ‘아이온’이다.

세 번째 시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아이온에 시간을 초월하여 있는 사건의 원형이 지상의 인간들의 시간 의식인 크로노스와 맞닿을 때 그 접점 지점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때’라고 묘사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예수님도 이 때, 곧 카이로스에 의해서 움직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 죄 많은 인간의 보기에는 크로노스적으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전체 카이로스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과 반복으로 이어지는 단일 사건에 해당된다. 즉 ‘세상이 심판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세상 심판하기’이다.

일곱별 일곱 촛대, 그리고 니골라당(복음의 가치를 세상적인 성공 개념으로 바꿔 복음이라고 포장하는 시도를 한 집단)같은 개념은 늘 이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반복되는 내용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 곧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물론 일곱 교회란 남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언약적 교회로서 그 안에는 십자가 사건의 취지가 담겨 있다. 즉 아이온적으로 ‘교회되기’를 위하여 잠시 등장했다가 반복적으로 사라져야 할 크로노스적인 무수한 교회들이다.

니골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각각 자신들의 세대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 위하여 비-언약적 요인으로 반복적으로 출몰되어야 될 악의 표징이다. 즉 비-언약적인 인간의 기대에다 십자가 피의 능력을 결합시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과 다른 성과를 노리는 입장을 말한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곧 네가 본 바 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들과 금 등잔대들의 촛대는 무엇입니까? 신비라. 그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들은 일곱 교회이니라(계 1:20, kjv)’ 촛대로 나와 있지만 초를 올려놓는 것이 촛대이다. 기름으로 불을 켜는 것을 받치고 있는 것은 등잔대이다. 등잔대들은 교회라고 말해 주고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불을 밝히기 위해 올리브를 찧어낸 순수한 기름을 네게 가져오게 하여 등잔에 항상 불이 켜 있게 할지니라(출 27:20)’ 교회의 사명은 이 땅 위에 빛을 비춰야 한다. 빛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기름이 필요하다. 인본주의 적인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올리브기름을 짜내어 나온 생명의 말씀으로 세상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교회는 희로애락을 초월하여 항상 말씀의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름으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력도 부족한데 전기로 전구를 통하여 빛을 내고 있다. 등잔대도 없이 말이다. 성막 안에는 빛이 들어 올 수 없다. 성막 안을 유일하게 밝게 하는 성구는 등잔대 위의 기름 불 빛이다.

하나님은 빛으로 오셨다. 등대는 양쪽에 여섯 가지가 있으며 가운데에는 기둥이 있다. 그 기둥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여섯 가지는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일곱은 하늘의 완전수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완전한 빛을 비출 수 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말이다. 일곱별은 교회의 천사들이다. 라는 말은 완전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들이다. ‘주님께서 자기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며 그분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고(시 104:4)’

‘니골라(백성의 승리자)’는 사전적 의미에서 에베소와 버가모 교회에 침투한 초대 교회의 이단 일파이다. 한 번 믿은 후에는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다. 사도들의 교훈을 거스렸다(행 15:20~29).

니골라당은 첫째, 율법주의였다. 칭의를 거부하며 육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사랑을 더 중요시 한다. 그리고 철학과 유전, 할례와 절기 등으로 육신을 의지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의지 강한 행위주의 자들이다(계 2:6) 둘째는 방종주의 자들이다. 육체의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발람의 교훈과 우상의 재물을 먹는 것(민 25장)이다. 셋째는 ‘영지주의’이다. 예수님을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헬라의 철학 사상을 말하고 있다. 영과 육은 분리 되어 인간 스스로 노력하면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와 니골라 교리를 퍼뜨린 사람은 거짓사도 시몬 마구스(행 8:13~25)이다. 이 사람은 자기를 성부 성자 성신라고 말하며 자신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했다. 지금도 니골당은 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거짓 사도이며 목자이다. 성령을 통하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Daum 블로그

- 출 25:31-40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 슥 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지난 번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중 최대의 비밀이며 또 우리의 장래 모습인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계시록에서 우리의 장차 모습에 관해 말씀하시는 또 다른 비밀인 촛대에 대해 함께 누리기를 원합니다.

둘 다 공통점은 새 예루살렘이나 촛대가 모두 교회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표현하는 여러 단어들이 나옵니다. 백성, 아내, 신부, 친구, 몸, 성전, 자녀, 아들, 양자, 촛대, 새 예루살렘 등등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들 표현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단어들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우리가 신부로 잘 단장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또 다른 환상에는 교회가 촛대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촛대로 표현하였으며,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이것을 바로 알아야지 지금 그에 합당한 삶과 교회생활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과 오른 손에 일곱 촛대를 들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신구약으로 되어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계시는 하나님께서 빠짐없이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말 성경에 촛대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등대와 같은 단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또 제가 영어 성경을 여러 개 검색해 보았는데 어떤 번역본은 등대로 어떤 번역본은 촛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말 성경 중에는 공동번역 성경이 등경 곧 등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등대로 번역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의 연속성 면에서 구약에서 등대로 번역하였고, 또 계시록의 촛대는 예표인 구약 등대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영적인 의미에서도 등대가 합당한데 촛대는 스스로를 태워서 빛을 내지만 등대는 기름을 공급받아 빛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 중에 나오는데(슥 4:2,3) 순금 등대가 있고 그 위에는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잔에는 관이 연결되어서 등대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로서 올리브기름을 내는데 이는 바로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비록 구원받은 우리가 새 예루살렘과 또 빛을 내는 촛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경륜이 성취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고 빛을 스스로 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기 때문에 자신을 태워서 스스로 빛을 내는 촛대로 번역하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촛대(등대)에 계시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 계시록의 촛대에 어떤 의미가 있고 또 마지막에 촛대가 된 우리 곧 교회가 어떤 삶을 지금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구약을 통해 촛대 곧 등대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곧 모세와 스가랴와 요한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에 관한 상세한 계시를 받았고 그 중에 성소에 둘 등대에 대한 자세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스가랴 선지자 또한 이상들 가운데 등대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 또한 환상 가운데 촛대에 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먼저 촛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그림 및 간단한 설명)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모세가 받은 계시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실 성막(성전)에 관한 계시이며 그 성막은 하나님에 대해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풍성한 예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 촛대는 성막의 두 번째 곳인 성소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성막에 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성경 연구가들에 의해 그 은혜로운 내용이 잘 밝혀져 있고 많은 설교가들에 의해 또한 선포되어졌습니다. 촛대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본성과 사역에 관한 상징들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자료가 많기 때문에 여러분이 관심을 조금만 가지시면 그 내용들을 배울 수 있고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촛대가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측면의 내용을 말씀드리기 보다는 교회의 측면을 말씀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등대가 요한이 본 환상에 의하면 우리들의 장래 모습 곧 교회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측면에 대해서도 짧은 설교를 통해서 그 내용을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되는 핵심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이 등대와 부속 기구들이 전부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은 특별히 하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본래 흙이었고, 또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마지막 환상의 교회의 모습은 금 촛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은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마지막 모습은 그분처럼 새 창조 안에서 우리의 육적 본성이 사라지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모습으로 금의 성분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 양과 무게가 한 달란트라는 것은 우리가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이 온전하게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등대의 빛으로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지금 금 곧 신성으로 변해 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둘째는, 등대 전체가 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원하는 등대로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는 형태가 되는데 첫째는 두드려서 전체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요즘 각종 자동차나 전자제품처럼 가지는 가지대로 잎은 잎대로 만들어서 붙여서 조립하면 능률적이고 쉽게 될 것인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금 한 달란트를 남기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용하여 전부 두드려 펴고 모양을 내서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몰라서 그렇게 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흙이고 가시나무인 우리가 그분의 성품과 본성을 닮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난과 과정과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등대를 직접 제작했던 장인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등대를 만드는데 몇 번이나 두드렸을까요? 또 어떨 때는 세게 두드리고 어떤 때는 약하게 두드리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은 수많은 두드림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양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등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 쉽게 세상에의 축복과 성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특별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그 삶이 이 땅에서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길을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고 형제들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서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셋째는, 전체가 통째로 만들어졌고 서로 연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서 그분 안에서 서로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 면에서 우리는 각자가 흰 돌로서 오직 그분과 받는 사람만이 아는 이름을 가진 귀한 존재이지만 또 한 면으로는 서로 연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하나가 되지 말라고 해도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미워하면 서로 연하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분리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 가지 면에서 등대에 들어있는 전반적인 계시를 말씀드렸고 이제 등대가 가지고 있는 교회가 꼭 알아야 할 가장 핵심적 내용인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등대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원칙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서 만진다면 먼저 대를 따라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갈 때마다 손에 걸리는 것을 통과해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손에 걸리는 것이 바로 마디인데 꽃받침이라고도 합니다. 이 받침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빛이 있는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과할 때 그 다음으로 나갈 수 있으며 얼마간 부드럽게 나아가다 또 다시 이 마디와 부딪히게 되는 것이 반복됩니다. 이렇게 통과한 후에 우리는 둥글고 잎이 옆으로 넓게 난 꽃 모양을 한 것을 만지게 되는데 꽃받침과 꽃 모양을 합친 이것을 잔이라고 하며 줄기에 4개의 잔이 있고 양 쪽에 난 가지마다 3개의 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대에는 22개의 잔과 꽃송이가 있고, 마디(꽃받침)는 25개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왜 이렇게 걸리는 것이 많고 또 반복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디 혹은 꽃받침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죽음입니다. 즉 우리를 순탄하게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각종 형태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만날 때 그것을 단순한 어려움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지 하고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고 거기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 또한 죽을 때 비로소 그 위에 놓여있는 살구꽃잎 곧 부활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는 고난은 그야말로 비참한 것입니다.

살구꽃은 음력 2월에 피는 꽃으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입니다. 곧 겨울의 죽음에서 소생을 나타내는 꽃입니다. 고라의 배역 사건이 있은 후 열 두 지파가 가져온 지팡이 중 레위 지파를 위해 가져온 아론의 죽은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리게 한 후 증거궤 앞에 두어 표징으로 삼았는데 이는 고라와 같은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살구꽃은 새 생명, 새 소망, 새로운 충만 곧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민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등대에 있는 22개의 매 잔마다 이 마디와 꽃받침인 죽음과 그리고 꽃잎인 부활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잔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가지 끝에 있는 잔 위의 등이 빛을 밝혀서 항상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줄기에는 4개의 잔이 있는데 4는 피조물의 숫자입니다. 그러나 줄기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세 개씩 난 6개의 매 가지에는 또 각각 3개의 잔이 있는데 3은 신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이며 또한 부활을 알리는 수입니다. 요나도 삼일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고 주님도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줄기인 그리스도에 붙어 있는 가지 곧 교회는 신성의 충만함과 부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촛대 사이에서 인자 같은 이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계 1:18)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서 세세토록 계심을 선포하시며 촛대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이 촛대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곧 촛대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인 우리의 삶에 가장 근본 되는 것이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금으로 두드려져서 깊이 새겨져야 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죽었었노라 그러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다는 이 말씀은 그냥 간단히 흘려들을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성경의 기초이고, 교회의 기초이며, 우주의 기초이며, 새 창조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들의 삶의 가장 핵심 중의 핵심이고 근본이 되는 기초인 것입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대한 많은 책망과 또 칭찬도 있지만 그 기초는 전부 여기에 서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 붙들고 있는 증거 곧 죽음과 부활로 돌아오고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처음 생길 때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이 증언했던 내용입니다. 곧 교회의 시작될 때 외쳐졌고 이제 교회의 마지막에 있어 주님께서 직접 선포하시는 기초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그러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다 곧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여기에서 벗어난 것이요, 또 교회가 칭찬받을 것이 있다면 그것도 이것으로 돌아간 결과입니다.

3. 끊임없이 십자가로 돌아와야 하는 교회

등대에는 이미 본 바와 같이 십자가와 부활이 계속해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교회도 반복해서 이 근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양쪽 가에는 한쪽에는 죽음이 그리고 또 다른 쪽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역사 안에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역사는 십자가를 마주 대하고 거듭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것이 없이도 어떤 부흥이 있다면 그것은 기초가 없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되거나 참된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마디를 만날 때 마다 거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리고 교회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옛 창조에 속한 것의 의미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마디를 통해 하나님이 깨닫기를 원하는 옛 창조에 속한 것의 의미를 깨우칠 때 그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또 다시 마디를 만나게 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입니다.

4. 십자가는 영광과 충만의 길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 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갈 때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 천국에서도 잔치가 벌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움직임은 곧 하늘에서의 움직임이 되며 점점 그분의 영광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데 그 정점에는 빛이 있으며,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의 잔을 향해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일어나서 살구꽃을 만지고 영적 충만을 누리며 또 다시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한 잔을 지나고 나서 그 위의 잔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참된 성도에게는 성령의 살아있는 능력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이 살아계시며, 또 기적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알도록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굳이 십자가의 방법을 사용할까요? 그것은 한 면에서 우리 자신의 생명과 우리 자신에게 속한 능력과 우리에게 근원하는 모든 것과 우리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에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깊은 중심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끝에 이르렀다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새 창조의 세계가, 기적의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시작과 부활의 근원인 그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원리로 사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십자가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으로 된다면 이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묵상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 외에는 우리 발밑에 모든 근거를 잘라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모든 근원의 끝에다 계속해서 가져다 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담담히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의 상태로 반복적으로 우리를 갖다 놓는 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등대의 환상을 본 후에 천사가 그에게 네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가랴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전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슥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왜 하나님은 요한이 본 환상에서 성전의 많은 기구들 중에 하필 촛대를 들어서 교회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사랑과 빛이십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오지만 나머지는 그분을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고 그분의 성품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랑과 빛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촛대로 표현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촛대의 궁극적 이유는 빛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분의 본성처럼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우리의 미래입니까?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일본 촛대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일본 촛대는 자산 가격의 변화를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색깔의 직사각형과 수직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름을 부여하는 촛대와 모양이 비슷합니다.

색깔의 직사각형은 촛대의 "몸" 입니다.

몸 위와 아래의 선을 "그림자" 라고합니다.

이 유형의 차트는 일본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종종 "일본 촛대" 라고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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